한국외방선교수녀회

씨 뿌리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 김수진 루시아(인티 N 출판사 대표)

관리자 2023.05.19 11:23 조회 : 279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일입니다. 삼십 대 초반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해외로 긴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때마침 오래전 인연이 있던 수원교구 신부님이 페루에서 선교 중이시다는 걸 알게 됐고, 운 좋게도 연락이 닿아 신부님이 계신 마을에서 넉 달을 머물게 됐습니다.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해보고도 싶었던 터라 무척 설렜고 의욕이 넘쳤죠.


한여름의 끝에서 페루 쿠스코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가, ‘콤비(Combi)’라고 불리는 미니버스를 갈아타고 신부님이 계시는 삐뚜마르카(Pitumarca)’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도착해보니 저는 스페인어를 모르고 실용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제가 도움 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관할 마을에 미사 파견을 나갈 때나 교리 교육에 동행하는 일, 주일미사 후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일,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안시아노스(ansianos, 노인분들에게 식사를 마련해 대접하는 날을 이렇게 부르더군요)’를 함께 준비하는 일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부족함에 부끄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나름 적응하면서 저에게 주어진 일들을 즐겁게 해나갔습니다. 하지만 넉 달 동안 한곳에 머물며 지내다 보니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한국과는 사뭇 달랐고 일을 하는 속도나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어요때로는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나 크고 작은 일들과 부딪치기도 했고요. 그럴 때마다 저는 한국 사회에서 몸에 밴 기준대로 이렇게 하면 일이 좀 더 쉬울 텐데 어떻게 하면 좀 바꿔볼 수 있을까?’ ‘고민이 될 만한 일이 아닌데 왜 그럴까?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했고, 풀리지 않는 문제로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제의 원인이 다른 곳이 아니라 저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저 넉 달을 머물다 갈 방문자이자 여행자일 뿐인데 어느새 정들어버린 이곳 사람들에게 언제나 온화한 날만 있기를, 이 사람들이 언제나 나아지기만을 바랐던 겁니다. 그리고 제 답이 더 나은 답이라고 믿었던 거죠. 그래서 이곳의 일들에 깊이 개입해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싶었던 것이고요. 고작 넉 달 머무는 여행자가 말입니다.


 그 이후 페루를 떠나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한국외방선교수녀회수녀님들을 만나게 됐는데 수녀원이 있는 지역은 삐뚜마르카보다는 상황이 좀 나아 보였습니다. 수녀원에서 그 지역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수녀원과 주민들의 연대도 잘 이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동시에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수녀님들께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만큼의 관계를, 기반을 다지셨는지를요. 이만큼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폭풍과 폭우가 지나갔을까를요. 여기에서 다시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리기까지 또 많은 시간과 애씀이 필요할지도 생각해보게 되었죠.


페루에 머물 때 잠시 뵀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소속의 한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현지 신부님들과 함께 스페인어 성경을 케추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 하시며 저희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열매는 언제 맺힐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 생전에 그 열매는 못 볼 것 같아요. 그래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에요.”


돌아보면 제가 페루와 볼리비아의 선교지에서 만났던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모두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하느님의 긴 계획 속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었구나 싶어요가끔 그때를그곳에서 만났던 씨 뿌리는 사람들을 기억해봅니다그 삶들은 때때로 다른 물음이 되어 저에게 돌아오고는 합니다세속에서 너는 너의 밭을 어떻게 일구어갈 것이냐고어떤 씨를 뿌리고 어떻게 키워나갈 것이냐고요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괜찮은 농사인 것 같냐고요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그 질문을 마음에 담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답을 해나가는 과정이겠지요지금은 그저 그 물음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