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방선교수녀회

우리 앞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있고 우리의 얼굴은 그분 앞에 있다.

T Luke 2018.05.14 11:19 조회 : 1799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0)

무엇보다 먼저, 광야 체험을 할 때, 기도에 관하여 걱정하지 말자. 책 한 권을 들고 가라. 성경책이다. “난 기도해야 해, 난 기도해야 해. 어떻게 기도하지? 성경은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아니다. 그냥 우리 자신을 축복하고 십자가나 이콘 등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절하고 말한다, “이 집과 저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전부다.

광야 체험을 하는 동안 피곤하다면, 잠을 자라. 충분히 자면, 그 이후에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24시간 잘 수 있으나, 그렇게 자는 동안에도 기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아니면 걸을 수 있다. 시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상관없는 일이다. 완전히 자연스럽게 있어라. 기도는 휴식이다. 성령의 숨길 속에서 숨을 쉬라. 자유로워야 한다. 단순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를 먼저 사랑했던 하느님과 그래서 그 사랑을 돌려드리려고 하는 우리 사이의 완전히 자연스러운 관계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저는 광야체험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이 끝나기를 거의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이 너무 윙윙거리고 있어서요.” 그는 기도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머릿속이 수많은 걱정꺼리와 할 일들로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기도에 관한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다.

영혼이 광야로 들어가는 것은 완전한 휴식, 이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휴식하기엔 너무나 예민해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광야의 상황 그 자체가 우리를 쉬도록 해야 한다. 흥분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광야에서 우리가 안정되어 평화를 찾을 때까지는, 우리가 추구하는 하느님과의 결합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광야의 체험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고 싶으면 즉시 마셔라. 원한다면 스무 잔도 마셔라. 식사도 원하는 방식대로 하라. 이런 일정에 관해서 단순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있어야 한다. 광야 체험에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구조가 없다. 광야 체험에 들어갈 때에, 사람들이 첫 번째로 하는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진짜 광야에 있을 때, 당신은 손에 성경만 들고 말을 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것처럼 광야체험에서도 광야에 있는 것처럼 하라. 철저하게, 완전하게 자유로워라.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시간의 정상적인 제약 바깥에 있으며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광야 체험에서 기도하러 온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물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주님은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청원 목록을 밀어놓고 주님께 단순히 이렇게 말해 보라, “주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와 함께 제가 당신 앞에 온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이 모두를 돌보시라고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여 주님과의 대화를 끝낸다.

이제 우리는 묵상하려고 한다. 묵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묵상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관심을 두는 사람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관심을 두는 존재는 하느님이다. 그러니 그분에 대하여 생각한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성경에서 읽을 수 있는 그 말씀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이 있다. 관상이 있다. “관상”이란 침묵 속에서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고, 광야 체험이 들어오는 것은 이 시점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걱정하기를 멈추고 완전히 다른 존재에 열리는 마음의 침묵 속에서 광야로 들어간다.

걸을 때에 나무를 쳐다보든, 길거리의 사람들을 쳐다보든, 혹은 그냥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든, 우리 앞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있고 우리의 얼굴은 그분 앞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의 마음속에 사라진다. 그것이 전부다. 그것이 광야체험이다.

광야체험 속에서 하느님께 갈 때에, 단지 우리의 머리를 마음속에 넣고 실제로 그분을 보라. 거기에는 아무런 구조들이 없고, 아무도 우리에게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할 수 없다.

광야체험을 기도의 집과 혼동하지 말라. 광야에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과 떨어져 살아간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한 집에 살면서 우리의 방이 광야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혼자가 된다.

광야체험의 특별한 측면은 그 기간 동안 미사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사가 우리에게 온다. 하느님께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우리는 이 관상으로 들어가고, 광야체험은 우리에게 침묵을, 광야의 침묵을,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을 만나는 무한한 침묵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닿을 때까지 이 침묵 속에 계속 있다.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기도가 되어갈 것이다. 우리는 입술로, 혹은 머리로 기도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지도 않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의 시 한 구절에서 썼던 것처럼, “어둔 밤에, 염원을 갖고 사랑에 불이 붙어서 …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의 집은 이제 휴식하고 있다 … 그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나는 그분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어둔밤”). 이런 상태에서, 모든 감각들은 멈추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도가 되어갈 것이고, 점차 우리는 절대적인 존재에게 닿을 것이다. 이것이 광야체험의 정수다.

광야로 가기 위하여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가슴에 우리의 머리를 대고 쉬면 된다. 그분의 심장 고동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런 상태를 머리로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우리의 마음으로 이해할 것이다 ? 하느님의 마음과 닿아있는 마음만이.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8년 1월호
[원출처] <기도의 핵심으로>, 캐더린 도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