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선 주교의 삶

최재선 주교의 * 내 자신의 歷史 一部 2

관리자 2023.05.23 16:44 조회 : 119
최재선 주교의 “내 자신의 歷史 ”

내 자신의 歷史 一部 2.
나의 어린 시절과 신앙교육
내가 자란 곳은 시골 논밭에 둘러쌓인 조그마한 마을이였다. 동년배의 동무도 별로 없고 대부분 연장이 이웃 형님 누나들 사이에서 잘 형님 누나를 따라 풀도 베고 나물도 캐고 했다. 한번은 풀 베다가 왼손 집게손가락에 낸 상처 흔적은 아직도 있다.
이웃집 축담 돌 위에 앉아 하늘에 계신……. 성총을 가득히…. 란 주경을 큰소리를 외우며 노랐단다. 언제든 부모 형님 누나의 사랑 밑에 그때 그 나름대로 종교교육을 받었다. ‘우리가 죽으면 천당 간다.’라는 말에, 죽은 사람의 육신이 땅에 있는데 어떻게 천당에 올라가는가 하며 내 나름대로는 고민을 했다. 대제는 父母 따라 함께, 첫 고해는 6세 때 했고 그때 아버지가 사주신 검은색 묵주는 신학교 입학한 후 얼마 안 되어 묵주 철사 고리가 달아 망그러졌다. (뜨러졌다)
7세 때쯤 나의 셋째 형 분도가 신학교 공부를 계속 못 하게 되어 집에 왔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울면서 나 같은 것이 어찌 신부의 아버지가 되겠는가 하면서 슬피 울던 소리가 내 오늘도 쟁쟁 울린다. 그다음 나도 모르게 아버지께서 나에게 희망을 걸 서당에 보냈다. 나는 열심히 서당에 다녀 千字文, 四字小學, 通鑑, 여름에는 天高談, 馬上談 등 배웠다.
서당이 있는 윗마을에 가면서 특히 오면서 묵주를 자주 바쳤는데 묵주 드리는 시간이 부족하여 이리저리 돌면서 신공을 끝냈다. 그때 박이란 나보담 나이는 위라도 공부는 내 밑이였다. 그 큰 아이가 천주교를 욕하며 비웃고 나를 괴롭혔다. 허나 신앙에는 조금도 굽히지 않했다. 남의 물건은 사소한 것이라도 갖고 오면 안 된다는 종교교육으로 남의 조그마한 못 쓸 것도 갖고 왔다가는 도로 제자리에 가저다 두었다. 부모와 함께 매일 신공을 드려서 옛 긴 조과 만과도 쉽게 모두 외웠다. 신공에는 발음하나 글자 하나도 잘 못 발음을 하거나 빼면 안 된다는데 꾀 많은 신경을 씃다. 그러는 중 어떻게 되였던가 신학교에 가겠다는 마음이 굳혀졌다.
(고 최재선 주교님의 친필 원고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올리는 이유는 주교님의 글에서 묻어나는 그분만의 언어나 표현방식 그리고 생생함, 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최재선 요한 주교(1912. 1. 7- 2008.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