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에 설립된 공소.
언양 지방의 간월(1815~1860년). 대제(1840~1868 년)공소에 이어 설립된 공소로서 처음에는 안살티 공소에서 시작되었다. 1868년 대체공소가 포졸들에 의해 해체되자 일시 피난 갔던 신자 몇몇 가정이 숨어들어 왔으며 지금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살티는 전쟁 을 위한 화살을 만드는 시현이라는 뜻과 박해를 피해와 살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살티, 살틔, 살터, 시현등으로 표기되어 왔다. 최 재선 주교님 태어나기 전 가족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박해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워 신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피난처가 되었다.
간월 공소에 이어 대재공소가 박해의 영향을 받자, 살아남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안살티 마을을 이루었다가 김영제가 방면된 이후, 김씨, 최씨, 남씨들이 이주해 와서 현재의 살티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증거자 김영제 베드로의 묘(1827~1876)
1868년경에 시작되어 부산교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살티공소 구역 내에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있다.
김영제는 경신박해 때 간월에서 체포되었다가 방면된 후 다시 병인박해 때 (1868) 2차 체포, 경주로 압송되어 대구, 서울로 옮겨지며 문초를 받다가 국가경사로 풀려났다. 피신한 가족을 수소문하여 살티로 내려 왔으나 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