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선 주교의 삶

최재선 주교님과 함께한 모금 여행

관리자 2022.08.01 17:12 조회 : 305
최재선 주교님과 함께한 모금 여행
미국에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나도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내 계획은 기대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가만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가난한 한국 사람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재선 주교님이 미국에 오셨다. 당시 외국의 많은 주교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세계의 보물 창고라고 일컫는 미국을 찾아오는 것처럼 최 주교님도 자신이 맡은 부산 교구를 위한 모금과 선교 사제를 구할 목적으로 오셨다.
볼티모어 국제공항에 도착한 바로 그 날부터 주교님과 나는 모금 운동에 나섰다. 길고 더운 여름 동안 서쪽으로는 미네아폴리스까지, 북쪽으로는 케나다의 몬트리올, 그리고 남쪽으로는 멕시코의 멕시코시티까지 여행을 했다.
최 주교님에게 그 여행은 태어나 한국을 떠난 첫 해외 나들이였다. 경상도 산골의 구석진 마을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주교님은 바다 건너 저편에 있는 미국에 대해 말과 글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와서 자신의 눈으로 미국의 풍요와 부귀를 보자 가벼운 쇼크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주교님이 도착하기 전에 주교님과 같이 할 6개월 동안의 여행 일정을 미리 계획해 놓고 있었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50개 이상의 성당에서 주교님이 모금 강론을 할 수 있도록 본당 신부들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모금 여행은 한동안 망설임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정한 틀을 갖기 시작하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금요일이 되면 일요일에 강론할 성당으로 주교님을 모셔가서 본당 신부에게 소개한 다음, 주교님을 그 성당에 남겨두고 나는 다른 성당으로 가서 주교님의 이름으로 모금 강론을 했다.
월요일이 되면 주교님을 모시러 갔다. 그리고 일주일의 나머지 날에는 미국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을 찾아갔으며, 또 우리가 방문하는 지역에 있는 신학교나 수녀원을 찾아가 강론을 하기도 하고, 한국에 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기도 했다.
월요일은 일주일 가운데 가장 좋은 날이었다. 주교님을 모시러 가면 주교님은 언제나 기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나를 보자마자 방으로 안내하고는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대성공이야, 대성공!”
그리고는 모금 총액을 말해 주었다. 그 금액은 언제나 큰 액수였다. 주교님은 마치 마술사가 옷소매에서 색종이를 계속 끄집어내듯 정신없이 현금과 수표 그리고 이름과 주소가 적힌 헌금 약정서들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그런 다음 주교님은 내게 물었다.
“신부님의 모금은 어떻습니까?”
내 대답은 언제나 약간 실망적이었다. 왜냐하면, 큰 성당은 주교님 몫이고 나는 일부러 작은 성당을 골라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신부였지 주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나 주교님보다 모금액이 적었다.
최 주교님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비록 주교님의 영어는 초보적이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은 주교님의 진실성과 순진성에 본능적으로 좋은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