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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좌(?) 공소 시절에 -가톨릭평화신문

T Luke 2017.10.20 10:06 조회 : 116

 

                        

“언제나 기도하면서, 기도하면서… 나를 앞세우지 말고, 주님을 앞세우고… 꼭 잊지 마라.”

지난 2008년 96세로 하느님 품에 안기신 최재선(요한 사도) 주교님이 깨우쳐 주시던 이 말씀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살아 있다. 봉사직을 살던 이들에게 주시던 이 말씀은 내게 큰 힘이 됐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최 주교님을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기억하지만, 난 영적 스승으로 기억한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이면, 난 최 주교님을 떠올린다. 유난히도 묵주기도를 권유하셨기 때문이고, 또 당신께서도 쉬지 않고 기도하시며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은퇴한 뒤 한국외방선교수녀회에 숙소를 두셨던 최 주교님은 수녀회 뜰에 있던 성모상 앞에서 즐겨 기도하셨다. 그러다가 때로 소나기가 쏟아부어도 미동도 하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 최 주교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이들은 누구나 떠올리는 모습이다.

내가 최 주교님을 처음 뵌 건 해운대 장산공소에서였다. 지금은 본당이 됐지만, 그때는 허름한 공소였다. 최 주교님은 당시에 교구장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두 선교회를 설립한다. 한국외방선교회(1975년)와 한국외방선교수녀회(1984년)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피로 주님을 증거했듯이, 우리도 그 보답으로 더 어려운 나라에 선교하도록 하고자 하려는 뜻이었다.

당시 장산공소에선 모본당인 동래본당에서 주일마다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해주셨다. 그러던 중 더는 신부님이 오시는 게 어려워지자 우린 최 주교님께 미사 집전을 요청드렸다. 그런데 최 주교님께서 기꺼이 승낙해 주시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장산공소는 ‘주교좌 공소’가 됐다.

그때는 최 주교님이 지금의 부산교구청 자리인 남천동에 사실 때였다. 해서 장산공소에 최 주교님이 오시려면, 두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1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그래서 시간도 덜 걸리고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좌석버스를 이용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차는 돈 많은 사람이 타는 차야”라고 말하며 거절하시는 게 아닌가? 또한, 주일미사 전 공소에서 준비한 점심은 전 교우들이 다 함께하기를 고집하셔서 주일마다 국수를 삶아 모든 교우가 점심을 나누던 기억도 새롭다. 식사 때도 음식을 식탁에 흘리거나 남기는 걸 싫어하셨고, 반찬도 한두 가지 이상은 올리지 못하게 했다. 주교관 또한 냉난방기 하나 없었고,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끄고 늘 두툼한 옷차림으로 지내셨다. 방문한 우리가 추워서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식복사도 주교님댁 방문 때마다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먹는 것도 시원찮은 데다 발이 시려워 지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후 부산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명동 근처 거래하던 은행에 가고 있을 때 가방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시는 최 주교님을 뵌 적이 있다. 5월 하순, 제법 더워진 한낮이었는데, 최 주교님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송했다. 통일호 기차를 타고 오셔서 명동성당 주교관에 가시는 중이라고 하셨다. 점심은 싸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열차에서 때우셨다면서 입 언저리에 김 조각이 군데군데 붙어 있는 상태로 계면쩍으신 듯 웃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최 주교님은 통장에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어려운 곳에 나누어 주셨다. 장산공소도 최 주교님께서 틈틈이 주시던 돈을 모아 자체 건물을 마련하는 데 긴히 쓸 수 있었다. 말년에는 한국외방선교수녀회에 당신이 거처하시던 사제관을 내놓으시고 경비실에 딸린 좁은 문간방에서 지내셨다. 그렇게 청빈과 검소, 절제를 몸소 보여 주셨다. 책에서나 읽어봄 직했던 우리 신앙 선조의 이야기를 난 최 주교님에게서 봤다. 겸손과 가난의 덕을 실천하는 ‘일상의 성인’이 바로 최 주교님이셨다.

이학노(유스티노, (주)윤세통상 대표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