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공간|성소자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서 3, 1)

T Luke 2018.03.14 09:56 조회 : 2429
   

우리는 성전에 들어 가셔서 그분의 백성을 만나러 오신 주님을 경축합니다. 동방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 축일은 “만남의 축일”이라고 불리웁니다. 그것은 하느님, 우리 세상에 새로움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아기가 되신 하느님, 그리고 성전 안에 있는 나이든 남자와 여자로 상징되는 기다리고 있던 인류의 만남입니다.

 

또한 성전에서는 두 쌍의 사람들 사이의 만남도 있습니다. 젊은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나이 많은 시메온과 한나. 젊은이들이 나이든 이에게 의지하고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받습니다. 성전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그들 민족의 뿌리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약속은 단순히 개인들 안에서 이루러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단 한번 그러나 공동체와 함께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이루러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또한 마리아와 요셉이 그들 믿음의 뿌리를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책에서 배워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앞서 간 사람들의 경험에서 배워지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예술입니다. 두 젊은이는 나이 많은 두 사람과의 만남 안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두 나이 든 이들은 그들 날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예수님, 그들 삶의 의미를 받습니다. 이 사건은 요엘의 예언을 이룹니다.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서 3, 1) 이 만남에서 젊은이들은 그들의 사명을 보고 나이든 이들은 그들의 꿈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들여다 봅시다, 사랑하는 봉헌된 형제 자매님들. 모든 것이 주님과의 만남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봉헌의 여정은 만남과 부르심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바르게 제대로 기억한다면 그 만남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로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백성, 교회, 젊은이들과 나이든 이들이 있었습니다. 젊은 마리아와 요셉이 충실하게 율법을 지키고? 복음은 우리에게 이것을 네번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나이든 시메온과 한나가 와서 예언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것은 조금 다른 방식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열정적으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젊은이들이고 한편 나이든 이들이 과거를 보호합니다. 복음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우리가 서로 만날 때 하느님의 놀라우심이 곧바로 잇따릅니다.

 

이러한 일이 봉헌 생활에서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 없이 주님과의 만남을 결코 새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이들을 뒤에 남겨 둘 수 없고 결코 세대를 넘어설 수 없고 다만 우리는 항상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매일 서로를 동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새로운 문들을 열도록 부름 받는다면 나이든 이들은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관습은 그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나이든 이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젊음을 유지합니다. 나이든 이들과 젊은이들 사이의 이 만남이 없이 미래는 없습니다. 뿌리 없이 성장이 없고 새로운 싹이 없이 꽃피울 수 없습니다. 기억 없는 예언이 없고 또한 예언 없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만남.

 

오늘날의 광적인 속도는 자주 남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남을 향해 많은 문들을 닫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오로지 쇼핑몰들과 인터넷 연결들만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봉헌 생활과 함께 있어야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형제와 자매가 내 역사, 소중히 여겨지는 선물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결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의 눈보다 더 많이 우리 핸드폰 화면을 보지 않게 하소서, 또한 주님보다 더 많이 소프트웨어에 집중하지 않게 하소서.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계획들과 방법들 그리고 조직을 중심에 둘 때마다 봉헌 생활은 매력을 잃게 됩니다. 그 봉헌 생활은 더 이상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즉 그 봉헌 생활은 그 토대와 그 뿌리 바로 그것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잘 되지 않습니다.

 

봉헌 생활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납니다. 즉 그분은 가난하고 순결하고 순종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길을 따라 여정을 나아갑니다. 한가지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 모든 것이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돌아가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의 응답, 그 응답은 “만약~라면” 이라든가 “하지만”(즉, 조건과 이의 : 역주)이라는 것이 없을 때, 그분의 가난과 순결과 순종 안에서 예수님을 본받을 때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헌 생활은 덧없는 부유함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한 분을 껴안지만 이 세상의 삶은 우리를 쥐고 흔들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이기적인 쾌락과 욕망을 추구합니다. 봉헌 생활은 온전히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소유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없이 합니다. 세속적인 삶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봉헌 생활은 더 위대한 자유로서 겸손한 순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삶은 금방 우리의 손과 마음을 텅 비게 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삶은 그 마지막까지 우리를 평화로 가득 채우십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그들 두 팔에 주님을 안고 그들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삶의 황혼까지  온 복음 말씀처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메온처럼 주님을 “두 팔에”(루카 복음 2,28) 받아 안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우리 머리와 마음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손” 안에. 즉 기도 안에서 일터에서 식탁에서 전화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어디서든. 주님을 “두 팔에” 안는 것은 편협한 신비주의와 정신 없는 행동주의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감상적인 경건함과 지쳐 버리는 과다행동주의 두 가지 모두를 고쳐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음미하는 것은 또한 일상의 마비에 대한 치료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매일 매일 은총의 “대혼란”에 이르도록 우리를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불꽃을 일으키는 비밀은 기꺼이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보도록 하고 그분에 의해서 만나지도록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이 답답한 삶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삶에서 불만, 비통함과 피할 길 없는 실망이 우리를 이깁니다. 예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로서, 젊은이와 나이든 이로 만난다는 것, 그리고 “예전에 좋았던 시절”이라는 무미건조한 미사여구-영혼을 죽이는 노스탤지어- 그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것. 우리가 예수님과 우리 형제 자매들을 우리 삶 매일의 사건 안에서 만난다면 우리 마음은 더 이상 과거나 미래에 매달려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모두와 함께 평화 안에서 “하느님의 오늘”을 경험할 것입니다.

 

복음의 끝에서 봉헌 생활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예수님과의 또 다른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덤 앞에 있는 여성들의 만남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들의 여정은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여러분도 흐름에 역행하는 여정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쉽게 가난을 거부하고 순결함과 순종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저 여인들처럼 굴려 낼 무거운 돌이 무엇이든 간에 걱정하지 말고 (마르코 복음16,3 참고) 계속 앞으로 나아 가십시오. 그리고 그 여인들처럼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십시오. 그 여인들처럼 그분을 붙잡으십시오(마태오 복음 28,9 참고) 그리고 기쁨에 넘치는 여러분의 눈을 형제 자매들에게 말해 주기 위해 서둘러 떠나십시오(마태오 복음 28,8 참고). 이렇게 하여 여러분은 교회의 영원한 새벽입니다. 여러분, 봉헌된 형제 자매 여러분은 교회의 영원한 새벽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바로 이날 여러분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하기를 청합니다. 그분을 따라 함께 걷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의 눈에 빛을 주고 여러분의 걸음에 힘을 주실 것입니다. 

2018 22차 세계 축성생활의 날

축성생활자들을 위한 미사 강론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