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공간|성소자

희망으로 미래를 끌어안는 봉헌 생활

조분희 2016.10.21 16:08 조회 : 2559
 

봉헌 생활의 해를 맞이하여
모든 봉헌 생활자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교서


사랑하는 봉헌 생활자 여러분,

저는 주님께서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의 힘을 북돋워주라는 임무를 맡기신 베드로(루카 22,32 참조)의 후계자로서, 또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봉헌된 여러분의 형제로서 이 글을 씁니다.

복음에 온전히 충실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예수님을 따르라고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함께 감사드립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우리가 온 세상에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증언하도록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수도자 관련 내용이 담긴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수도 생활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Perfectae Caritatis)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과 봉헌생활회와 사도생활단 성(수도회성)의 요청에 응답하여 저는 ‘봉헌 생활의 해’를 선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봉헌 생활의 해는 2014년 대림 제1주일인 11월 30일에 시작하여 2016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끝날 것입니다.

저는 수도회성의 의견을 듣고, 제삼천년기를 맞이하여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교회 전체에 제안하셨던 것을 이 봉헌 생활의 해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봉헌생활」(Vita Consecrata)에서 이미 제시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영광의 역사뿐만 아니라 아직 이룩해야 할 위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훨씬 더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여러분을 파견하실 그 미래로 눈을 돌리십시오”(「봉헌생활」, 110항).

I. 봉헌 생활의 해의 목적

1. 첫 번째 목적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수도회는 저마다 풍요로운 은사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기원에는 하느님의 활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에서 따르고 특별한 삶의 형태로 복음을 실천하며, 신앙의 눈으로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내고 창의력을 가지고 교회의 필요에 응답하라고 일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러한 초기의 경험이 점차 성숙하고 발전하면서 새로운 지리적 문화적 상황에 있는 회원들을 받아들였고, 은사를 실천하는 새로운 방법과 사도적 사랑을 표현하는 새로운 노력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씨앗이 자라나 나무가 되고, 그 가지들이 옆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 동안 모든 수도회 가족이 저마다 그 시작과 역사적 발전을 돌아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는 교회가 아름다워지고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다양한 은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함입니다(교회 헌장 12항 참조).

수도회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정체성을 지키고 수도회 가족의 일치와 회원들의 소속감을 다지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고고학을 따라하거나 쓸데없는 향수에 잠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설립자들과 초기 공동체들을 비롯하여 과거 세대에게 영감을 주었던 눈부신 이상과 계획과 가치들을 파악하기 위하여 과거 세대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수도회의 역사를 통하여 은사가 어떻게 실천되어 왔고, 그 은사가 어떠한 창의력을 발휘하였으며, 또 어떠한 어려움들에 직면하여 이를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의 나약함이 낳는 모순과, 심지어 때로는 은사의 본질적인 측면을 일부 망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는 가르침이 되고 회심하라는 호소가 됩니다.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50년 세월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공의회는 온 교회에 불어넣어진 성령의 ‘숨결’을 나타냅니다. 공의회 덕분에 봉헌 생활은 풍요로운 쇄신의 여정을 걷게 되었고, 이 여정은 명암이 교차하는 가운데 성령의 현존으로 두드러진 은총의 시기였습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면서(1요한 4,8 참조)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겸손되이 고백하는 때이며, 그 나약함 안에서 자비로우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때도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는 봉헌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 안에 깃든 거룩함과 활력을 세상에 힘껏 외치고 기쁘게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2. 이 봉헌 생활의 해에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성령께서 오늘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기억하면, 우리 봉헌 생활의 본질적인 측면들을 더욱 깊이 있게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수도원 생활부터 오늘날의 ‘새로운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봉헌 생활은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성령의 부르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수도 생활 교령 2항 참조). 수도회 설립자들에게 절대 규칙은 복음서였고, 다른 모든 규칙은 단순히 복음서의 표현이며 복음을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그리스도였고, 바오로 성인처럼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필리 1,21)하고 말할 수 있기까지 그분께 온전히 투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서원은 오로지 그들의 열렬한 사랑의 실천에서만 그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 동안 우리 또한 복음의 요구에 응답할 것인지, 응답한다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겠습니다. 또한 복음을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가 해야 하는 선택의 참된 ‘지침’으로 삼고 있는지도 자문해야 합니다. 복음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으며 철저하고 진실한 삶을 요구합니다. 복음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날마다 기쁘게 묵상하지만 묵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실천하라고, 곧 당신의 말씀을 삶 안에서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원했을 때 다짐한 대로 참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첫 사랑이며 유일한 사랑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되실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진리와 자비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기에 사랑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수도회 설립자들은, 목자 없이 흩어진 양 떼와 같은 군중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연민을 같이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연민에 이끌리시어 말씀을 주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으며, 빵을 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던 것처럼, 설립자들도 그 자신들을 파견하신 성령의 뜻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인류를 섬겼습니다. 여기에는 전구 기도, 복음 강론, 교리 교육, 가르침,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 대한 봉사가 있습니다. 사랑은 무한한 창의력을 지녀 모든 문화와 사회 분야에 복음의 숨결을 불어넣는 수많은 길들을 열어주었습니다.
 
봉헌 생활의 해는 우리가 맡은 사명에 얼마나 충실한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직무와 활동과 현존이, 성령께서 우리 설립자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에 부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직무와 활동과 현존이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합합니까? 그 가운데 바꾸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설립자들과 같은 열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만큼 그들 가까이에 있습니까? 그들의 필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립자들을 이끌었던 것과 같은 관대함과 자기 희생으로, 그들의 영적 자녀인 여러분은 그 은사를 생생하게 보존해야 합니다. 이 은사를 일깨워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 은사의 본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은사를 풍요롭게 하고 상황에 적용하여 교회에 이바지하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에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1)

우리의 시작을 기억하면 봉헌 생활의 또 다른 측면이 환히 드러납니다. 설립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열 두 사도의 일치와 최초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특징인 친교에 사로잡혔습니다. 설립자들은 저마다 공동체를 세우면서 복음적 모범을 따르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님 함께 기쁨을 누리고자 하였습니다(수도 생활 교령 15항 참조).
 
현재를 열정적으로 사는 것은 ‘친교의 전문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느님 계획 안에 펼쳐지는 인간 역사의 정점인 ‘일치를 위한 계획’의 증인이며 설계자” 2)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들이 공존하지 못하고 충돌하며 가장 약한 이들이 멸시를 받는 불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지닌 존엄성을 인정하고 저마다의 은사를 함께 나누면서 형제자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의 구체적 본보기를 보여주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친교의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용기를 내어 갈등과 긴장이 있는 곳에 가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요한 17,21 참조) 사람들의 마음에 열정을 부어주시는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보여주는 믿을 만한 표지가 되십시오. 만남의 신비를 실천하십시오. 이 신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능력, 함께 길과 방법을 모색하는 능력” 3)으로, 모든 인간관계의 모범이신 하느님의 세 위격이 맺으시는 사랑의 관계에서 빛을 받는 것입니다(1요한 4,8 참조). 

3. 희망으로 미래를 끌어안는 것을 이 봉헌 생활의 해의 셋째 목적으로 삼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봉헌 생활이 직면한 어려움들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서방 세계의 성소자 감소와 회원들의 고령화, 심각한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재정적 문제들, 국제화와 세계화의 도전들, 상대주의의 유혹들, 소외, 사회적 관계 단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 안에서 희망의 덕을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 희망은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예레 1,8 참조)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역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통계 수치나 사업의 성취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분(2티모 1,12 참조),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루카 1,37) 분께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이며, 봉헌 생활이 앞으로도 그 위대한 역사를 계속 써나가도록 해 주는 희망입니다.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위대한 일들을 하시고자 우리가 미래를 향하도록 재촉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수치와 효율성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자신의 힘을 믿으려는 유혹에는 더욱 더 넘어가지 마십시오. 깨어 있으면서 여러분의 삶과 현재 이 순간의 지평을 주의 깊게 살피십시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함께 저는 여러분에게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 봉헌 생활의 종말이나 무의미함을 선포하는 비관주의적인 예언자들과 함께 하지 마십시오. 바오로 성인의 권유대로(로마 13,11-14 참조), 오히려 깨어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빛의 갑옷을 두르십시오.” 4) 언제나 주님을 믿으며 계속해서 우리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  
 
저는 특별히 젊은이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수도회의 품 안에서 이미 적극적으로 살고 새롭고 아낌없는 마음의 선택으로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기에 수도회의 현재입니다. 이와 동시에 여러분은 조만간 수도회의 활성화와 양성과 봉사와 사명을 이끄는 책임을 지도록 부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수도회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에 젊은이 여러분이 앞선 세대와 먼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십시오. 형제적 친교 안에서 여러분은 앞선 세대의 경험과 지혜로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며, 이와 더불어 앞선 세대가 처음에 지녔던 이상을 되찾도록 그들에게 여러분의 힘차고 새로운 열정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수도회 공동체가 합심하여 복음을 실천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고, 증거와 선포에 대한 요구에 더욱 효과적으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봉헌 생활의 해에 서로 다른 수도회들의 젊은이가 함께 모일 기회를 갖게 될 것임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이러한 만남은 친교와 상호 지지와 일치를 촉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II. 봉헌 생활의 해에 대한 기대

제가 이 은총의 봉헌 생활의 해에 특별히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수도자들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 제가 언젠가 드렸던 이 말씀이 언제나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채워 주시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과,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라는 부르심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형제애가 우리의 기쁨을 더욱 자라게 하고, 교회, 가정, 젊은이, 노인,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것이 자아 실현의 길이며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준다는 것을 체험하고 보여주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슬픈 얼굴이, 불만스럽고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슬퍼하며 따르는 이는 슬픔의 후계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곧 영적인 어둔 밤과 낙담, 질병, 노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온전한 기쁨’을 찾아야 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과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기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효율과 건강과 성공을 높이 숭배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패배자들’을 배척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합니다.”(2코린 12,10)라는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을 인용하면서 「복음의 기쁨」에서 제가 쓴 것을 봉헌 생활에도 잘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때문입니다”(14항). 그렇습니다. 봉헌 생활은 우리가 근사한 성소 모집 활동을 벌일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나는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매력이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이 우리가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때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봉헌 생활의 사도적 효율성은 그 수단들의 효율성과 효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삶, 곧 복음을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쁨과 아름다움이 온전히 빛을 내는 삶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 해 성령 강림 대축일 전야 기도에서 제가 여러 교회 운동 단체 회원들에게 드렸던 말씀을 여러분에게도 되풀이하여 말씀드립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가치는 복음을 실천하고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회 안에 하느님 나라의 누룩으로 존재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증언으로, 곧 형제적 사랑과 연대와 나눔의 증언으로 그러한 누룩이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회 운동 단체들과 함께 한 성령 강림 대축일 전야 기도에서 한 연설, 2013.5.18.).

2. 저는 여러분이 ‘세상을 깨우기’를 기대합니다. 봉헌 생활의 특징적인 요소가 바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29일 수도회 총원장들에게 말씀드렸듯이 “철저히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주님을 특별한 방식, 곧 예언자적 방식으로 따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증언하는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결코 예언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속해 살아가는 역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석하는 능력을 하느님에게서 받습니다. 예언자는 밤을 지새우며 여명이 밝아오는 때를 아는 파수꾼과 같습니다(이사 21,11-12 참조). 예언자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의 형제자매인 사람들도 알아봅니다. 예언자는 식별의 능력이 있고 죄악과 불의를 고발할 줄 압니다. 예언자는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이외에 그 누구도 주인으로 여겨 응답해서도 안 되며, 하느님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으레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 편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유토피아’ 안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을 희생하고 형제애를 나누며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복음의 논리가 살아있는 ‘또 다른 장소들’을 만들어가기를 기대합니다. 수도원, 공동체, 영성센터, 공동체 마을(치타델라)5), 학교, 병원, 위탁 가정, 그밖에 사랑과 우리가 받은 은사의 창의력이 낳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낳을 모든 장소들은 더욱 복음에서 힘을 얻는 사회를 위한 누룩이 되고, 진리와 예수님 말씀의 힘을 증언하는 “산 위의 고을”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와 요나처럼 여러분도 종종 달아나려는 유혹, 예언자의 임무에서 벗어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예언자의 의무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며, 때로는 지치고 결과가 실망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결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에게도 확신을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

3. 수도자들은 다른 모든 봉헌 생활자들과 마찬가지로 ‘친교의 전문가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이 강조하신 “친교의 영성”이 현실화되고, 여러분이 앞장서서 이 새 천년기에 “우리가 당면한 큰 과제”를 맡아주기를 바랍니다. 이는 “교회를 친교의 원천이며 친교의 학교로 만드는 것” 6)입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에, 저는 여러분의 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 천년기」립자들이 추구했던 형제애의 이상이 동심원처럼 모든 차원에서 퍼져나가도록 여러분이 모든 노력을 다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친교는 무엇보다 먼저 수도회에 속한 각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에 관하여 비난, 험담, 시기, 질투, 반목은 우리 수도회 가정 안에 머물 권리가 없는 태도라고 끊임없이 드렸던 저의 말에 다시 귀 기울여볼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사라질 때, 우리 앞에 열린 사랑의 길은 거의 무한합니다. 서로에 대한 환대와 관심의 추구, 곧 물적 영적 재화를 서로 나누고 형제애로 서로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며 가장 약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더불어 사는 ‘신비’”로 우리의 삶을 “거룩한 순례”7)가 되게 합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들이 점점 더 국제화 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로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각자 지닌 고유의 재능과 더불어 환대받고, 모두 함께 책임을 온전히 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저는 또한 서로 다른 수도회 회원들 사이의 친교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를, 자기 수도회의 울타리를 더욱 과감하게 벗어나 지역적 세계적 차원에서 양성과 복음화와 사회 참여의 공동 계획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기회로 삼을 수 없겠습니까? 그러한 공동 계획을 통하여 예언자적 증언은 더욱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은사들과 성소들의 친교와 만남은 희망의 길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 자기 힘만으로 미래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남과 대화와 경청과 상호 도움에 늘 열려 있고, 자아도취의 질병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친교라는 진리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미래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봉헌 생활은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를 비롯하여 교회 안의 모든 성소들 사이의 진정한 상승 효과를 추구하여, “먼저 그들의 내적 생활 안에서, 나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침내 교회 밖으로까지 친교의 영성을 전파” 8)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4. 저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 요구하는 바를 여러분에게도 기대합니다. 곧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삶의 변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라.”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당부로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르 16,15 참조). 온 인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어려움에 처한 가정들, 버려진 어린이들, 미래가 없는 젊은이들, 병자들과 버려진 노인들, 물질적 재화로는 만족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한 사람들, 거룩함에 목말라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수도회 가족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질식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 갇힌 포로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주면서 생명을 찾고, 희망을 주면서 희망을 찾으며,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난민을 환대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창의적으로 교리교육을 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다른 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를 기대합니다. 따라서 저는 조직을 간소화하고, 복음화와 사랑의 현실적 요청에 더욱 부합하는 사업들을 도모하고자 큰 [수도회] 건물들을 용도에 맞게 변경하고, 새로운 필요에 맞게 사업들을 조정하기를 희망합니다.

5. 모든 봉헌 생활이 하느님과 오늘날의 인류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문해 보기 바랍니다.

수도원과 관상 생활을 지향하는 단체들이 서로 만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계되어, 기도 생활에 대한 경험을 서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온 교회와 친교를 깊이 맺는 방법과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지원 방법, 더욱 진지하게 영적 생활을 추구하거나 정신적 물질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동행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서로의 경험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과 문화 증진에 헌신하는 애덕 수도회들, 복음의 선포에 투신하거나 특수 사목의 직무를 수행하는 수도회들, 사회 구조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재속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놀라운 창의력으로 매우 다양한 형태의 생활과 활동을 낳아주셨기에 그것들을 쉽게 분류하거나 미리 만들어진 도식에 끼워맞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각각의 고유한 은사의 형태를 일일이 말씀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봉헌 생활의 해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회 생활 안의 자신의 현존에 대하여 성찰하고, 우리 주변에서 계속 발생하는 새로운 요구들과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응답하는 방법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요구에 관심을 갖고 성령의 이끄심에 순명할 때 비로소 이 봉헌 생활의 해는 참된 때(kairos), 곧 하느님의 은총이 넘치는 때, 변모의 때가 될 것입니다.

III. 봉헌 생활의 해의 지평

1. 저는 이 교서를 통하여 봉헌 생활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과 정신과 사명을 공유하는 평신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일부 수도회들은 이와 관하여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지만 또 다른 수도회들은 좀 더 최근에 이러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사실 사도 생활단과 재속회도 마찬가지이지만 각 수도회 가족을 감싸 안는 더욱 큰 가족, ‘은사의 가족’이 존재합니다. 이 가족 안에는 같은 은사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인 수많은 수도회들, 특히 평신도의 처지에서 동일한 은사의 실재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됩니다.

저는 평신도 여러분도 이 봉헌 생활의 해를,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더 잘 깨닫도록 해 주는 은총으로 받아들여 살아갈 것을 권유합니다. 이 해를 온 ‘가족’과 함께 지내어 더불어 성장하고 오늘날 사회 안에서 성령의 부르심에 함께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 수도회의 봉헌 생활자들이 서로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평신도 여러분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선물을 드러내고 다른 은사 가족들과 다른 평신도 단체들의 경험을 알고 서로 풍요로워지며 서로 지지해 주십시오.
 
2. 봉헌 생활의 해는 봉헌 생활자들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해당됩니다. 따라서 저는 그리스도인 백성 전체에게 말씀드리며,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이어온 위대한 성인들의 후계자들인 많은 봉헌 생활자들의 존재가 곧 선물이라는 인식을 더욱 갖도록 권유합니다. 베네딕토 성인과 바실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베르나르도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안젤라 메리치 성녀와 빈첸시오 드 폴 성인, 이들이 없었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요한 보스코 성인과 콜카타의 데레사 복녀에 이르기까지 그 숫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6세 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표지가 없다면, 교회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도 식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의 역설도 무디어지며, 세속화되어가는 현대 세계에서 신앙의 ‘소금’마저도 그 짠 맛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복음의 증거」, 3항).

그래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봉헌 생활의 해를 지내며,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감사드리고, 설립자들의 성덕과 수많은 봉헌 생활자들이 그들 고유의 은사에 충실한 덕분에 우리가 여전히 누리는 모든 은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도록 권유합니다. 여러분 모두 봉헌 생활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교회 전체의 것이기도 한 그들의 직무와 일에 어떤 방법으로든 협력할 것을 권유합니다. 봉헌 생활자들이 그리스도인 백성 전체의 사랑과 온기를 느끼도록 하여 주십시오. 

기쁘게도 봉헌 생활의 해가 가정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개최되는 때에 거행되는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정생활과 봉헌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풍요와 은총을 가져다주는 성소이며, 핵심이 되는 관계 형성을 통하여 인간화가 이루어지는 공간, 곧 복음화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3. 저는 이 교서에서 가톨릭 전통과는 다른 전통을 지닌 교회들에 속한 봉헌 생활자들과 형제회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수도 생활은 갈라지지 않는 교회의 유산으로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안에서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이러한 수도생활의 유산과, 좀 더 뒤에 서방 교회가 아직 하나로 일치되었던 시기에 있었던 또 다른 경험은 개신교 전통의 교회 공동체들의 유사한 계획들에 영감을 주었고, 이 공동체들은 그들 안에서 계속해서 또 다른 형태의 형제적 공동체와 봉사를 낳았습니다.

수도회성은 다양한 교회들 안에서 봉헌되어 형제적 생활을 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을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만남을 진심으로 권유합니다. 이러한 만남은 상호 이해와 존중과 협력을 증진하여 봉헌 생활자들의 교회일치 운동이, 더욱 커다란 여정인 모든 교회의 일치에 도움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4. 또한 우리는 수도 생활과 또 다른 형태의 형제적 수도 공동체들의 면모가 모든 주요 종교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와 일부 주요 종교 전통의 수도자들이 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경험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봉헌 생활의 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고 봉헌 생활자들이 이러한 대화에 열려 있으며, 서로 더 깊이 이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자문하고,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공통 분야에서 협력하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함께하는 여정은 언제나 풍요를 가져다주며,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민족들과 문화들 사이의 관계에도 새로운 길을 터줄 수 있습니다.

5. 끝으로 저는 특별히 형제 주교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봉헌 생활의 해를 맞이하여, 봉헌 생활을 수도회 가족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선익(교회 헌장 43항 참조)에 이바지하는 영적 자산으로 여겨, 진심으로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기회를 마련하기 바랍니다. “봉헌 생활은 교회에 주어진 선물로, 교회 안에서 태어나고 교회 안에서 자라며 온전히 교회를 향해 있습니다.”9) 따라서 봉헌 생활은 교회에 주어진 선물로, 고립되거나 소외된 실재가 아니고 교회에 온전히 속한 것입니다. 봉헌 생활은 그리스도인 소명의 내재적 본질과, 신부인 교회 전체가 한 분이신 신랑과 결합하려는 갈망을 표현하기에, 교회 사명의 핵심 요소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 생활은 “분명히 교회의 생활과 성덕에 속합니다”(교회 헌장 44항).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여러분이 개별 교회의 목자로서 여러분 공동체 안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다양한 은사들을 장려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 은사들을 지지하고 활기를 북돋우며 식별을 돕고,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상황에 처한 일부 봉헌 생활자들에게 애정과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에게 봉헌 생활의 가치를 가르쳐 주어 교회 안에서 봉헌 생활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빛나도록 하기 바랍니다.

저는 경청과 관상의 동정녀이시며, 사랑하는 아드님의 으뜸 제자이신 동정 마리아께 이 봉헌 생활의 해를 맡겨 드립니다. 성부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따님이시며 은총의 모든 은사를 받으신 성모님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봉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탁월한 모범으로 바라보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실 은총과 빛의 은사에 지금부터 여러분 모두와 함께 감사드리며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내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14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프란치스코

 <주>

1) 요한 바오로 2세, 신세계 복음화 500주년을 맞이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수도자들에게 보낸 교서 「복음의 길」(Los caminos del Evangelio), 1990.6.29., 2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 제64호, 74면 참조.
2) 봉헌생활회와 사도생활단 성, 지침 「수도자와 인간의 진보」, 1980.8.12., 24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수도 생활에 관한 교회 문헌』(2판 1쇄), 713면.
3) 프란치스코, 로마의 교황청립 대학 학장들과 학생들에게 한 연설, 2014.5.12.
4) 베네딕토 16세, 주님 봉헌 축일 강론, 2013.2.2.
5) 역자주: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 루빅이 로피아노에 세워진 ‘마리아의 도시’라는 의미의 마리아폴리에 부여한 이름. 포콜라레 운동의 참여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일종의 마을로 일반 도시처럼 집들과 일터와 학교로 이루어진다. 현재 거의 모든 대륙에 존재하며, 마리아폴리 외에도 다른 많은 치타델라들이 복음의 이상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이름과 고유한 모습으로 생겨났다.
6)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2001.1.6., 43항, 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8호(2001), 9면.
7)「복음의 기쁨」, 87항.
8) 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봉헌생활」(Vita Consecrata), 1996.3.25., 51항, 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3호(1997), 5면.
9) 베르골료 주교(프란치스코 교황), 교회와 세상 안에서 봉헌생활과 그 사명에 관한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총회에서 한 발언, 1994.10.13.